마법소녀 사사키 미이의 우울 #1

2025.09.02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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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등교한 사사키 미이는 멍한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하늘이 맑았다. 그렇게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하늘은 태연하게 푸르렀다. 미이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빈 책상들 사이로 드문드문 학생들이 채워진 교실은 고요하기 그지없어 미이의 한숨 소리는 맨 뒷자리에 앉은 친구에게까지 닿았다. 맨 뒷자리에서 공부하던 친구가 고개를 들어 미이의 뒷모습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문제가 잘 안 풀리는 모양이네, 미이 쨩. 적절한 이유를 찾아낸 친구는 제 할 일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미이는 잠시 왔다 간 시선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읽히지도 않는 글자를 노려보았다. 뒷자리에 앉은 사야가 일정한 간격으로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불안한 마음을 조금 가라앉혀 주었음에도 도저히 심란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어제부터 마음을 어지럽히던 고민거리를 해결하지 못한 탓이다. 미이는 아침 하늘의 맑고 옅은 푸른색을 바라보며 다시금 어울리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미이. 무슨 일 있어?”

“사-쨩…… 어떻게 알았어?”

“방금 전이 벌써 다섯 번째 한숨이야. 처음에는 문제가 안 풀려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거 같아서.”

사야의 말에 미이가 멋쩍게 웃었다. 의식하지도 못한 새에 그렇게 한숨을 많이 쉬었던가? 괜히 사야의 공부를 방해한 것 같아 미안했다. 힘없이 웃은 미이는 여섯 번째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있지, 사-쨩.”

“응.”

“만약에 사-쨩한테 아주 큰 비밀이 있다고 쳐.”

“그래.”

“그런데 그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어떻게 할 거야?”

“모르는 사람이라면 신경 쓸 것 없지.”

사야가 딱 잘라 대답했다. 어차피 모르는 사람인데 뭐 어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사야의 얼굴에 미이가 아하하, 작게 웃었다. 명쾌한 해답이지만 달리 도움은 되지 않았던 탓이다. 왜냐하면 비밀을 들킨 사람은 완전히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음, 친하진 않은데 얼굴이랑 이름 정도는 아는 사람이라면?”

“하아, 미이. 도대체 누구한테 뭘 들켰기에 그래?”

“1학년 부회장인 이즈미 군한테……. 학생회 때문에 말 몇 마디 섞어본 게 다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미이가 우는 소리를 했다. 사야는 몇 달 전의 선거에서 본 1학년 부회장의 얼굴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있게 공약 발표를 끝내고 단상에서 내려가는 얼굴이 끝내주게 잘생겼던 탓이다. 전세계적으로 미남이 부족한 이 시대에 그런 외모란, 쉽게 잊힐 만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 이즈미 미츠키의 동생이니까. 이즈미 미츠키. 재미없는 진학 명문 K학원에서 유일하게 배출해낸 아이돌. 아이돌의 동생이라는 것만으로도 교내 유명 인사가 되기에 충분했는데, 본인도 형에 비교해 모자라지 않는 미모의 소년이었다. 학생회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는 육상부 부장이 기억할 만도 했다.

이즈미 이오리가 사교적인 성격이 못 된다는 사실은 교내에서도 유명했지만, 그가 사교적인 성격이 되든 못 되든 같은 학생회 소속인기에 그도 미이의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K학원 학생회는 매달 한번씩 모여 학생들이 할 수 있을 법한 자질구레한 업무들을 처리하곤 하니까, 5월이면 면식 정도는 생길 법하다. 학생회에 편성된 예산을 관리하는 미이의 직책 특성상 말 몇마디 정도는 더 해봤을 거고. 아예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이보다는 이렇게 애매하게 아는 사이가 더 곤란하긴 하지. 미이의 비밀이 뭔지도 모르면서 걱정하는 이유를 납득한 사야는 작게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렇지만 사야는 동시에 그런 생각도 했다. 그저 그런 정도의, 면식만 있는 사이라면 뭘 들켜도 상관없는 것 아닌가? 친구도 많지 않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소문을 퍼트릴 일도 없지 않은가. 도대체 뭘 들켰기에 이렇게 아침부터 한숨을 쉬는 건지 모르겠네. 그런 결론에 도달한 사야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질문했다.

“뭘 들켰기에 그래?”

“사-쨩에게도 못 말하는 거야…….”

이것 봐라. 사야는 미이를 쳐다보았다. 미이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5년지기 친구에게도 말 못하는 비밀이라는 게 뭔데? 서운했지만 사야는 그를 따져 묻는 대신 시선을 다시 문제집으로 내렸다. 자신 또한 미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 한 가지쯤은 있으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사야는 가방에서 교과서를 꺼내며 차분한 말씨로 질문했다.

“그 비밀. 미이의 사회적 체면과 관련된 거야, 아니면 금전적 손해가 생기는 거야?”

“굳이 따지자면 사회적 체면과 관련 있을걸…….”

“얼마나 심각한데?”

“나 지금 할복하고 싶어.”

책에 적힌 필기를 노트에 옮기던 사야가 고개를 들어 미이를 쳐다보았다. 도저히 농담으로는 들리지 않았던 탓이다. 미이는 장난스러운 웃음 대신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벼운 일은 아니어 보였다. 도대체 무슨 비밀인지 궁금했지만, 사야는 일단 가장 중요한 것부터 질문했다.

“상대의 반응은?”

“……그냥, 바보같은 얼굴로 쳐다봤어. 알아봤겠지? 역시?”

안절부절못해하는 모습이 귀여워 보이기는 했으나, 역시 그 정도의 반응이라면 할복하고 싶다는 건 과장일 테다. 사야는 한숨을 쉬었다. 미이의 한숨이 제게로 옮겨온 것 같았다. 그 정도 아닌 것 같은데. 이치노세 사야가 5년동안 봐온 사사키 미이는 쪽팔림에 할복해야 할 수준의 이상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다. 별 것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떠는 게 오히려 더 그럴듯했다.

“도대체 뭘 했는데?”

“그냥. 뭘 한 건 아니고……. 지뢰계 옷 같은 거 입고…….”

“겨우 그거야?”

사야는 울상이 된 미이의 얼굴을 보고 어이없어져 언성을 높였다. 지뢰계 옷. 로리타 프릴 드레스 같은 것 아닌가. 공주풍 원피스 입은 정도로 사회적 체면이 박살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트리건지 뭔지 하는 제 오시 아이돌 악수회에도 평범하게 꾸미고 가는 미이의 평소 이미지를 생각하면 호들갑 떠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만……

“유아퇴행 로리타 원피스 입은 걸 봤다니까?”

그게 뭐 어때서? 사야가 함께 언성을 높이는 미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걔가 소문이라도 냈어?”

“……그건 아니지만.”

“아니면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봤니?”

“굳이 따지자면 좀 놀란 것 같긴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어.”

제 턱을 붙잡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미이를 보며 사야가 헛웃음을 지었다. 얘가 뭘 잘못 먹었나. 별 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을 다 떠네. 그 이즈미인지 뭔지 하는 남자애를 좋아해서 예쁘게 보이고 싶은 게 아닌 이상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미이는 트리거 쫓아다니느라 연애에는 관심도 없…….

이즈미 이오리, 그러고 보니까 트리거 누구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사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이를 쳐다보았다.

“미이. 너 그 이즈민가 뭔가 하는 애 좋아해?”

마른세수를 하며 뭔가를 웅얼거리던 미이는 사야를 쳐다보았다. 어이가 없었다. 쟤가 지금 뭐래? 매일 악수회 다닌다고 공부에 손 놓은 것 같아 보이긴 하지만, 나도 고삼이거든? 미이가 눈을 부라렸다.

“고삼이 연애는 무슨 연애야?”

“그럼 고삼이 아이돌 겐바는 왜 따라다니는데?”

“그건……! 우읏.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잘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좋아해?”

“그럼 뭐가 문젠데?”

사야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미이를 쳐다보았다. 미이는 혼자 앓는 소리를 내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 뭔가 더 있어.”

“뭔데.”

“사-쨩한테는 말할 수 없어.”

“뭐길래?”

사야는 슬슬 제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사키 미이가 겨우 유아퇴행 로리타 프릴 드레스 입은 것 가지고 이럴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텐데 그 다른 이유를 죽어도 말하지 않으려는 꼴이 슬슬 짜증나기 시작했다. 그 ‘이즈미 군’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뭔데?

미이가 의자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의자 등받침을 베개 삼아 기대어 사야의 얼굴을 바라보며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사회적 체면이 박살나고 말거야……. 사-쨩이 내게 가진 인텔리한 이미지도 같이.”

사야는 헛웃음을 지었다. 인텔리한 이미지라니. 그건 미이가 아이돌 팬이 된 2년 전에 박살났다.

“별로 그런 이미지 안 가지고 있으니까 말해.”

“말할 수 없어……. 죽을 때까지 비밀로 가져갈 거야…….”

“도대체 뭐길래 그러는데?”

미이가 고민하다가 입을 열려는 찰나, 앞문 쪽에서 웬 목소리가 들려왔다. 3학년 여자 반 구역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변성기 지난 소년의 목소리였다.

“사사키 씨 계신가요?”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미이가 자세를 바로했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1학년임을 뜻하는 노란 넥타이를 맨 소년이 열린 앞문에 서서 미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이는 창백해진 얼굴로 사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어떡하지.’라고 쓰여 있었다. 사야는 한숨을 쉬곤 말했다.

“다녀와.”

미이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나 없다고 해 주면 안 돼?”

되겠냐? 미이는 사야의 표정에서 그런 문장을 읽었다. 사야가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널 정확히 바라보면서 불렀는데 퍽이나 믿겠다. 다녀와.”

“우으…….”

앓는 소리를 내던 미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앞문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니 정말 어지간히 가기 싫은 모양이었다. 사야는 측은한 눈길로 미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쯤이면 모두가 떠올리고 있을 의문 한 가지를 사야도 떠올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비밀을 들켰기에 그러지?